시조님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이도(李棹) 어르신이시다.

시조께서는 웅진 지방에 호족장으로 기거하시던 중 고려 태사(太師)로 첫 이름은 치(齒)라 하였으며 처음에 전의현(全義縣)에 출사하시어 사셨다.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 길에 올라 금강에 이르렀을 때 마침 강물이 불어 넘쳐 건너지 못 할 새 이를 호보한 功으로 이름을 하사하고 통합삼한(統合三韓) 개국익찬공신(開國翊贊功臣)으로 봉작하니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고려조 이래 거의 일천여년(一仟餘年)이 지나 송도(松都)는 이미 망하여 王씨의 후손은 겨우 및몇밖에 남아있지 아니하며 함께 공을 세운 집안이 무려 수십여 가(家)가 있으나 그 중에 파평윤씨(坡平尹氏) 동원최씨(東原崔氏) 유주(문화)류씨(儒州(文化)柳氏)와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만이 빛나는 전통(傳統)을 이어올 뿐으로 아우러져 영광(榮光)을 누리는 집안이 거의 없음은 이는 오로지 자손(子孫)들이 한만(汗漫)하여 유구한 전승을 이어 나가지 못한 때문이다.

태사공(太師公)께서 신흥하는 고려의 국운을 도와 공훈을 세우시고 이 지방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 어려운 고빈에서 구하였으니 그 공덕이 위대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훌륭하신 어른이 남기신 공덕도 그 그늘이 오대(五代)를 넘기지 못하는 법이니 만약 자손이 대대(代代)로 선대(先代)의 덕(德)을 생각하고 더욱 힘써서 조상을 욕되게 함이 없도록 조심하지 않는다면 쓰러진 나무에서 곁가지가 다시 나서 자라나듯이 재기하지는 못할 것인즉 어떻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면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즉 후손 된 자 모름지기 조상이 격어 온 유래와 은덕을 잊지 말고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