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抗日獨立運動史에 오른 4人 >

 

이극로(李克魯) 號는 물불, 고루, 동정(東正) (1893-1978) 禮曹參判公 長의 15代孫이다. 獨逸 베르린대학 經濟學博士(1927년), 世界弱小民族大會 朝鮮代表(1927년), 朝鮮語學會 幹事長(1929년), 滿洲 길돈사건 동포 慰問 朝鮮 各  單體聯盟代表(1930년), 朝鮮語學會 事件으로 逮捕되어 6年刑 宣告를 받음(1942년), 咸興형무소에서 獄苦를 치르다가 해방과 더불어 出獄(1945년), 조선말큰사전 全6卷 刊行(1947년), 南北協商에 건민회 代表로 참석, 北韓에 잔류(1948년), 祖國平和統一 委員會 委員長(1970년)

 

이희승(李熙昇) 字는 聖世 號는 一石 (1896-1989) 副司直公 三奇의 15代孫이다. 京城帝大法文學部卒業  朝鮮語學會 正會員 幹事長으로 綴字法統一案을 만들어 이를 基礎로 우리말辭典 編纂作業을 進行中 1942年10月  治安維持法 違反으로 日警에 逮捕되여 懲役 3年刑을 宣告받고 咸興刑務所에서 獄苦를 치르다가 815光復과  더불어 出獄하였다. 1961年 23萬單語가 收錄된 국어대사전 刊行 1967年7月 韓國語文敎育會 組織活動 1956年以來 宗族首班으로 宗事領導

 

이교남(李敎南) 初名 敎玉 (1909-1948) 1927年 高敞高等普通學校 進學 1928年 校內 反日讀書會 事件으로 日警에 逮捕되여 酷毒한 惡刑을 받았으며 光州學生義擧에 同志들과 高敞장날 排日萬歲示威를 決行하려다 學生들과 같이 檢擧되여 2年6月의 懲役刑을 宣告받았는데 拷問으로 半身不具 精神異常이 되어 滿期에 臨追하여 釋放되였으나 食事도 떠먹이고 大小便도 받아내며 延命하다 1948年 別世하였다.

 

이종만(李鍾萬) 字는 敬憲 號는 溫齋 (1892- ) 定平府使公 孝碩의 17代孫이다. 1912年日帝가 强壓으로 實施한 朝鮮人戶籍法과 納稅義務履行을 拒否煽動한 嫌疑로 日警에 被檢되여 淸州刑務所에서 懲役 1年刑을 마치고 出獄하여 同志 89名들과 反日運勳을 組織化하여 朝鮮獨立運動을 위한 啓蒙을 目的으로 朝鮮民團을 創立하여 勞動者大會를 열고 隣近邑面에서 講演會를 開催하여 獨立思想 鼓吹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