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를 탄생하게 명당을 잡아준 주호대사의 사당

진양각(眞陽閣)


진양각 : 주호선사상 봉안불당
소재지 : 영모재 뒤쪽 산기슭
태사공 선산의 량혈(良穴)을 지점하여 준 당승(唐僧) 주호선사를
모신 불당으로 고박한 석불상일좌를 봉안하고 있다.

진양각은 공주시 신관동 석방현(石傍峴)에 있다.

이곳에는 주호대사가 잡아 주었다는 이도의 선조 이석재(李碩材)의 묘가 있으며 진양각 아래에는 전의·예안이씨 시조 이도의 先代를 추모하는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진양각에 모셔져 있는 분은 중국의 주호대사(朱昊大師)이다.

주호대사는 당나라 사람으로 풍수에 능한 고승으로 811(통일신라 헌강왕 3년) 신라의 풍수를 살펴보기 위하여 유람 중 금강에 다다라 사공에게 강을 건너 달라고 부탁하자 모두들 그의 행세가 남루한 것을 보고 대꾸도 하지 않자 이방이(李芳伊-이도의 선조)는 두말없이 그를 건너 주었는데 그는 강 건너에 무엇인가 놓고 왔다며 다시 건너가기를 청하자 이방이는 아무 불평없이 다시 건너 주었고 이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지만 싫은 기색 없이 모두 응하여 주자 주호대사가 감복하여 보아하니 상중인것 같아 묻자 아버지(李碩材)가 돌아가셨는데 묘 자리를 잡지 못했다하자 주호대사가 이방의 어질고 착한 마음씨와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명당자리를 잡아 장사지내게 하자 명당이 발복하여 백년 후 이도(李棹)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이 주호대사가 쓴 진양재집에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화 신묘시월(元和 辛卯10월-811년 신라 헌덕왕 3년)에 금강나루터에 이르니 뱃사공의 관인 후덕함에 감명하여 금강 북쪽 가까운 곳에 산소자리를 하나 점지하여 그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니 그 자리는 간좌(艮坐)의 언덕인데, 강물이 동쪽에서 흘러들어 서쪽으로 흘러가니 만대토록 부귀영화를 누리 수 있는 크게 발복할 곳이다.

큰 인선을 베푼 사람이 아니고서는 얻기 어려운 명당이다.

내가 이방이(李芳伊)의 지극한 효성을 보니 반드시 후세에 경복을 누릴 것이므로 그 아버지 이석재(李碩材)를 그곳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때는 시월 초구일 축시라 연월일시의 간지를 보면 신묘년 기해월 임인일 축시(辛卯年 己亥月 壬寅日 丑時)이므로 천문으로는 지뢰복괘(地雷復卦)이니 칠일만에 다시 출발 하였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괘이고 지리로는 수화미제괘(水火未濟卦)이니 꽃이 아직 활짝 피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고 달이 아직 완전히 둥글지 아니한 형상이다. 이곳에 장사 지내면 800년후에는 자손이 크게 떨칠 것이며 하늘이 돕고 땅이 받들어 줄 것인 까닭에 나 역시 그 인효의 덕에 감각하여 기꺼이 지점하여 주고 기록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후 명당의 발목으로 이도(李棹)가 태어나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우자 응양군 대장군(應楊軍 大將軍)으로 발탁되고 고려개국 통합 삼한 익찬공신 2등으로 책훈되었으며 관직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고 전산후(全山侯)에 봉작되었다.

또한 본명이 이치(李齒)를 도(棹)자를 하사하여 이도(李棹)라 부르게 되었으며 전의·예안이씨 시조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주호대사가 잡아준 명당 덕분이라 생각한 우리이씨들은 선산사당위에 주호대사를 모신 사당을 지어 놓고 매년 제향을 지낸다.

진양각은 1칸짜리 맛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사당안에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주호대사상이 안치되어 있고 현판은 진양각(眞陽閣)이라 쓰여 있다.

 


조역비(兆域碑)
소재지 : 신관동 120번지


통로비(通路碑)
소재지 : 신관동 10번지(영모재 통로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