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師公先山俗傳

山所는 忠淸南道 公州의 錦江북쪽에 있는데 壬坎方 來龍에 卯方入水요 良坐坤向이며 丙得水酉破이다(물이 두 번 보이고 두 번 끝나는 것을 기준으로 말함) 形局으로 말하자면 渴龍飮水形이고 山 이름은 石傍峴 (돌겯재)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傳說에 李太師의 始祖님의 先代가 錦江가에 살면서 往來하는 사람들을 배로 건네주었으며 매우 厚德하여 恩惠를 널이 베풀었다.

어느 날 異常한 僧侶가 錦江에 와서 이 사람이 積德한 것을 알고 좋은 墓 자리를 잡아 주었으며 이곳에 葬事를 지내면 子孫이 매우 繁盛하여 錦江 물이 마르지 않는 한 李氏는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至今까지 千年에 가까운데도 이 고장 사람들은 이곳을 李太師先山이라고 指稱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大體로 太師公 先祖께서 錦江을 잘 건너 줌으로써 高麗太師가 있었다고 한다 즉 太師公의 先代가 代代로 公州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은 確實히 말할 수 있고, 이미 공주에 살고 있었다고 先山이 또한 錦江위 어디인가 있을 것은 조금도 異常할 것이 없다.

다만 太師公께서는 고려태조(왕건)가 전의지방에 1천호의 식읍을 관장하는 지방관으로 계셨으며 뒷날에 全義의 雲住山 아래(李姓山城 遺墟趾)에 居住함으로써 子孫이 드디어 全義로 姓의 貫鄕을 삼은 것이다.

公州의 山所에 對하여는 詳考할만한 文獻이 없으며 또한 太師公 以上 몇 代의 葬地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後孫 知敦寧府事 徵嚇가 公州牧使로 在任할 때(全義李太師仙山)이라고 색인 石碑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宗中에서 異論이 없지 아니하여 山所의 발치에 버려두었다.

英祖辛酉(1741)年에 徵夏의 季子 德顯이 또 公州判官이 되었을 때에 本土의 傳說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끝끝내 疑心하고 虛誕하다고만 한 일이 못된다고 하여 前日에 버려두었든 表石을 墓앞에 세워 因하여 守護 禁伐하는 지구로 삼았다.

이제 譜牒 重修에 즈음하여 關聯 文獻이 없어서는 아니 되겠으므로 簡略하게 傳說의 基本原因과 碑를 세운 事由를 記述하여 日後의 傳攷에 對備하는 바이다.

 <英祖甲戌譜(1754)修譜時 收錄> 역